박중양 ( 朴重陽, 창씨명 朴忠重陽, 1874∼1955? )

                          3·1 운동 진압 직접 지휘한 대표적 친일파

1908년 경북 관찰사.
1910년 충청남도 장관.
1915년 중추원 참의
1921년 황해도 지사.
1923년 충북 지사 .

친일 흠모론에 이른 야마모토

일제가 조선 식민통치 25주년을 기념하여 편찬한 {조선공훈자명감}(朝鮮功勳者名鑑)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이토 이하 총독부의 대관으로부터 역량·수완이 탁월하다고 인식되고 비상한 때에 진실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지사(知事)급에서는 박중양이다." 이렇듯 박중양은 일본인에 의해 능력을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신뢰도 받았던 대표적인 친일파였다. 박중양이 친일파로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일본어 실력 때문이었다. 경기도 양주 출신(경북 달성 출생이라는 기록도 많으나, 그가 대구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관계로 착오가 있었던 것같다)이었던 그는 청일전쟁을 전후하여 서울에 있던 일본인과 긴밀하게 교제하였고, 그들의 권유와 "일본인과의 교제 이래 국가 관념이 생기고 정치 방면으로 참여하고자 하는 욕망"이 일어나, 1897년 일본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박중양은 일본에서 약 7년간 생활하였다. 기독교 목사였던 혼다(本多庸一)의 식객으로 생활하다가, 그가 경영하던 아오야마(靑山英和)학원 중학부에서 수학하였다. 1900년 이 학교를 졸업하고는 도쿄 경시청에서 경찰제도연구생으로 경찰제도와 감옥제도를 연구 실습하였다. 이어 1903년에는 도쿄부기학교에서 은행업무를 익혔다. 이때 그는 야마모토(山本信)라는 일본 이름을 사용하였다. 일본 생활을 통하여 그는 많은 일본인 관료들과도 사귀었다. 특히 후지야먀(富山)현의 지사였다가 '병합' 후에 경기도장관이 되는 히카키(檜垣直右), 그 서기관이었다가 충북도장관이 되는 스즈키(鈴木隆) 등과도 교류하였는데, 같은 시기에 충남도장관이 되었던 박중양은 이를 "이웃 도에서 근무하게 된 것은 신(神)의 작희(作戱)라 할까, 꿈 밖의 꿈"이라고 감탄하였다. 박중양은 러일전쟁 때 귀국하여 고등통역관 대우로 참전하였는데, 인천, 진남포, 용암포, 안동현 등지에 종군하게 된다. 종군 생활을 마친 그는 농상공부 주사가 되었으나, 대구에서 거처하기로 하였다. 왜냐하면 대구는 그에게 낯선 지방이었지만 경성 정계의 동향을 관망하는 데 편리하고, 만일의 경우 도쿄로 가기도 용이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인들이 의병의 공격을 피하고 일본으로 도망가기 쉬운 철도 연변에 모여 살았던 것과 같은 발상이었다. 박중양은 대구에서 1년을 지냈다. 일본인과의 교제, 일본 생활, 종군 생활을 통하여 그는 일본인을 철저하게 신뢰하게 되었다. 즉, 그는 일본인의 신의와 우수성을 높게샀으며, 그들의 친절에 감탄하였고, 일본인 기녀에 대해 좋은 추억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의 국정 개선을 위해 생명을 돌보지 않고 자원하는 일본인의 의협심을 가슴에 담게 되었다. 일본을 이렇도록 흠모한 박중양은 이와 반대로 조선인들은 야만스럽고, 도벽이 있고, 또한 파괴성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한말의 탐학한 관찰사

당시 대구에서는 경부선 개통 이후 이곳에 몰려든 일본인과 경북 관찰사 사이에 빈번한 대립과 충돌이 있었다. 일본인들은 관찰사의 일을 방해했고, 배척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런 연유로 박중양이 대구에 있던 1년 사이에도 장승원, 이용익, 이근호, 신태휴 등으로 관찰사가 빈번하게 바뀌었다. 이때 박중양은 이 충돌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였다. 때로는 일본인의 편에서, 또 때로는 중간적인 입장에서 활동하면서 그는 일본인들로부터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런 소식이 서울에 전해지게 되어 그는 군부 기사가 되기에 이르는데, 의친왕이 일본에 갈 때 수행원(통역)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귀국 후 그는 이토의 힘으로 대구군수 겸 경북 관찰사 서리가 되었다. 수행원으로 갔을 때 이토에게 잘보였던 것과 일본인 거류민단의 소개가 큰 도움이 되었다. 이토는 박중양을 철두철미하게 신용하고 옹호하였으며 또한 애지중지하였다. 이런 탓인지 이토의 양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구군수로서의 박중양은 역시 대구에 있던 일본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당시 일본인들이 가장 원하고 있었던 것은 대구성벽을 없애는 문제였다. 훗날 일본인의 회고에서도 이 문제를 "대구 분요(紛擾:분란)의 병원(病源)"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다. 당시의 대구는 성을 경계로 하여 상권(商圈)이 나누어져 있었는데, 성내의 상권은 조선인 상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상권을 장악하려고 노심초사하던 일본인 상인들은 당연히 성벽을 허물어 상권의 구역을 없애려고 하였던 것이다. 박중양은 일본인의 요구를 충실히 좇아 일진회 회원을 동원하여 성벽을 허물고, 그 자리는 도로로 만들었다. 오늘날 대구의 동성로, 남성로, 북성로, 서성로가 바로 그 길이다. 일본인 상인이 상권을 장악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런 박중양을 일본 거류민들은 극구 칭찬하였다. 일본인들은 그를 '야마모토 군수'라고 불렀으며, 그 이전의 관찰사들이 대개 '한국식 대관에 지나지 않았지만 오직 한 사람, 일본 유학생으로부터 일어난 활동적인 걸물아'라고 칭찬하였다.(대구부 편, {대구민단사}, 78∼81면) 박중양의 이런 처단은 내부대신의 허가를 받지 않고 단독으로 처리한 것이었다. 그래서 내부에서는 박중양을 징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박중양의 배후였던 이토의 구원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박중양은 오히려 평남 관찰사로 영전하였다(1907). 그리고 다시 1908년에는 경북 관찰사가 되어 대구로 돌아왔다. 그는 이때에도 일본인의 편에서 행정을 실시하였다. 1908년 12월에 '일한민간친회'(日韓民懇親會)가 열였을 때 "소생이 일신을 바쳐 이 땅을 위해 진력하고자 함에는 일본인 제군의 지도편달에 달려있습니다. 이 땅의 한국인들이 희망하는 바는 귀국인이 스승으로서 책임을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라고 하여 일본인의 지도·계발을 요구하기도 하였다.(河井朝雄, {大邱物語}, 314∼315면)

이때의 이런 탐학과 친일활동을 당시의 신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비난하였다.

군수 노릇 할 때에는 성첩(城堞) 헐어 매식(賣食)하고, 관찰사로 있는 후에는 객사(客舍)까지 훼철(毁撤)터니, 황상폐하 남순(南巡)시에 일기불현(日旗不懸)하였다고 수창(壽昌)학교 폐지코자 학대(學大)에게 보고하니, 탐학하고 돈 잘 먹기 박중양이 날개로다. ({대한매일신보}, 1909. 2. 12, 春不春) 중양가절(重陽佳節) 말 말아라. 통곡(痛哭)일세 통곡일세. 누백년(屢百年)을 존숭(尊崇)하던 대구객사(大邱客舍) 어데 갔노. 애구(哀邱) 대구(大邱) 흥……. 중양가절(重陽賈節) 말 말아라. 전무후무(前無後無) 비기수단(肥己手段) 대구성곽(大邱城郭) 구공해(舊公해)를 일시간(壹時間)에 팔아먹네. 애구(哀邱) 대구(大邱) 흥…….({대한매일신보}, 1909. 1. 16, [重陽打令] 大邱童謠) 또한 평안남도 관찰사 이진호*(그도 유명한 친일파였다)가 탐학을 행하자 그를 '제2의 박중양'이라고 비난하면서, 남쪽 대구의 박중양의 혹독한 수완에 놀라워하며, 무고한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것을 슬퍼하였는데, 평남의 이진호는 심술과 수완이 모두 박중양과 동일하다는 것이었다. 박중양의 횡포로 인민이 고통은 말도 못할 지경인데, 박중양이 둘이나 되니 인민이 어떻게 살아갈지 민정(民情)을 슬퍼한다는 것이었다.({대한매일신보}, 1909. 1. 31, 논설 [第二朴重陽])

3·1 운동 진압 직접 지휘

'병합'이 되자 그의 친일행각은 날로 빛을 발하였다. 물론 그는 당시에 "폭풍과 홍수를 방어할 지력이 없고, 대세를 저항할 실력이 없다.……요로에 있으면서 민족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취할 길"이라는 근사한 이유를 내세우면서 계속하여 총독부의 고급 관료 자리를 옮겨다녔다. 1910년 충남도장관을 거쳐, 1915년 중추원 참의, 1921년 황해도 지사, 1923년 충북 지사, 1927년 퇴관하여 다시 중추원 칙임참의가 되었다. 그는 여러 총독 가운데서도 특히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총독을 좋아했다. 데라우치가 조선인을 본위로 정치를 행하여 조선 말기의 암흑시대를 명랑하게 만들었고, 특히 관개사업을 추진하여 농업을 발달시켰다고 평가하였다. 이런 총독 아래에서 도장관, 참의를 지냈던 것을 그는 아마도 영광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그는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막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당시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파들이 3·1 운동의 무모성을 지적하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국민이 독립생활의 능력이 없으면 국가가 부강할 도리가 없다. 독립만세를 천번 만번 외친다고 해도 만세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오직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주창하였다. 그리고 3·1 운동에 대한 직접적인 진압을 지휘하였다. 다름 아니라 자제단(自制團)을 통해서였다. 4월 6일 대구에서 '자제단 발기인회'가 조직될 때 그는 단장이 되었다. 자제단은 "경거망동으로 인하여 국민의 품위를 손상케 하는 일이 없도록 상호 자제케 함"을 목적으로 한다면서, "소요(3·1 운동)를 진압하고 불령한 무리를 배제"하는 것을 주요 활동으로 하였다. 이를 위해 불온한 행위를 하는 사람을 발견하면 곧바로 경찰관헌에 보고한다는 서약까지도 했다. 이 이후 경북도 참여관 신석린이 주동이 되어 안동, 성주, 군위, 김천 등지에 자제단이 조직되었다. 중국 침략를 감행한 일제는 그 침략적 야심을 착착 진행시켜 나가면서 마침내 태평양전쟁으로까지 치달았다. 이때 조선총독부에서는 장기전에 대처할 대내외 중요 정책을 입안·심의하기 위해 전시 최고 심의기관을 설치한다는 구상을 하였다. 그리하여 1938년 8월 27일 칙령 관제로 시국대책조사위원회를 설치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조선총독의 감독에 속하고 그 자문에 응하여 조선에 있어서의 시국대책에 관한 중요 사항을 조사·심의"한다는 기구였다. 여기에서 논의되고 결의된 것은 조선총독에게 건의되었다. 제2의 중추원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구성을 보더라도 정무총감이 회장이 되고 총독부의 현직 고등관들이 대거 참여하였던 점에서 중추원보다도 오히려 더 막강한 기구였다. 97명의 위원 가운데 조선인은 고작 11명뿐이었다. 박중양을 비롯하여 김연수*, 박영철*, 박흥식*, 윤덕영*, 최린*, 현준호*, 한상룡* 등 이들은 일제말의 대표적인 친일파들이었다. 이 위원회는 총독의 자문사항 18항목을 심의하기 위하여 편의상 3개 분과회로 나뉘어졌는데, 박중양은 문화·사회관계 및 일반사항을 다루는 제1분과에 소속되어, ① 내선일체의 강화·철저, ② 조선·만주·북지(北支)간의 사회적 연계 촉진, ③ 재지(在支) 조선인의 보호·지도, ④ 반도 민중의 체위 향상과 생활 쇄신, ⑤ 농·산·어촌 진흥운동의 확충·강화, ⑥ 사회시설의 확충, ⑦ 노무의 조정 및 실업의 방지·구제 등의 문제를 다루었다. 이때 박중양은 특히 내선일체와 농촌진흥 문제에 관심을 보여 발언하기도 하였다. 이런 활동과 더불어 1941년 중추원 고문이 되었고, 1943년에는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다. 이런 지위에 있으면서 박중양은 당시의 각종 친일조직에 참여하였다. 1941년 10월에 결성된 임전보국단의 고문, 1943년 1월 국민조선총력연맹(1940년 10월 설립)의 '참여'를 맡았으며, 학병을 권유하는 연설대에 참여하여 경남지방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일본이 싱가폴을 점령하자 '노구'(老軀)를 이끌고 일본군을 위문하기 위해 싱가폴까지 가기도 하였다.(이때의 모든 경비는 김갑순*이 부담하였다) 이런 친일 활동의 결과, 그는 1945년 귀족원 칙임의원이 되었다. 최상급의 친일파 7명에 끼게 된 것이다.

"이완용은 매국노가 아니다"라는 망언

해방 이후 그는 반민특위에 의해 반민 피의자로 검거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9년 1월이었다. 그런데 수감된 지 8∼9일 만에 폐렴이 발생하여 서울대학병원에서 몇개월간 치료를 받았다. 물론 다른 반민족행위자와 마찬가지로 흐지부지 처리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그에게서 친일행위에 대한 반성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반민법에 의해 잡혔던 것도 "시대 변혁의 희생이라, 역사는 윤환(輪環)하고 인사는 변천한다. 고금왕래(古今往來)로 크게 본다면 일소(一笑)에 불과한 희비극(喜悲劇)이다"라고만 생각하였다. 그는 "한말의 암흑시대가 일제시대에 들어 현대 조선으로 개신(改新)되었고, 정치의 목표가 인생의 복리를 더하는 것에 있었고, 관공리의 업무도 위민정치를 집행하는 외의 것이 아니었다"라고까지 했으며, "일정시대에 조선인의 고혈을 빨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의 연혁을 모르고 일본인을 적대시하는 편견"이라고 하여, 한말보다 일제시대가 훨씬 좋았다는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이완용은 매국노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이완용을 매국노라 매도하여 말하지만, 사람을 비판하는 것은 용이하되 국가가 위급존망한 때를 당면한 지도자가 선처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폭풍노도와 같은 대세를 항거할 수 없다. 국난을 당하여 자살하는 자는 있을지라도 사상계의 이전(利戰)은 될지언정 나라를 부지하고 백성을 구할 방도는 아니다. 누구라도 이완용과 동일한 경우의 처지가 된다면 이완용 이상의 선처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이완용 등은 매국노가 아니다.(박중양, {술회}) 최근 대구매일신문사에서 발행하는 {매일정보}라는 신문에 박중양에 관한 이야기가 3회나 실렸다([김용진의 대구이야기], 1991. 9. 27, 10. 4, 10. 11). 그 기사에서는 '뛰어난 일본어 실력', '총독부에서도 아깝게 본 인격과 식견' 등으로 박중양을 묘사하면서, 조선학생들을 구금한 일본인 헌병대장을 혼내고 학생들을 석방시킨 이야기, 실업청년들을 일본인에게 부탁하여 취직시킨 이야기 등을 소개하였다. 그러자 독립유공자협회, 독립유공자유족회, 광복회 등에 소속된 몇명의 회원들이 공동으로 이를 반박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일제시대에 활동하였던 거물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두 단면을 그대로 반영하는 일화이다.

                                                                    ■ 김도형(계명대 교수·한국사)

참고문헌

박중양, {述懷}.
대구부 편, {대구민단사}, 1915.
河井朝雄, {大邱物語}, 1931.
[대구상의 70년 이면사], {대구상의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