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 ( 尹致昊, 창씨명 伊東致昊, 1865∼1945 )

                           2대째 일본 귀족으로 입적한 '귀화한 일본인'

1941년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 위원장.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고문
1945년 칙선귀족원 의원.
1945년 대화동맹 위원장

타협적 개량주의자의 별절 행로

"우리 조선 민족으로서는 어디까지나 일본을 믿고 피아의 구별이 없어질 때까지 힘쓸 필요가 있는 줄로 생각하고……이후부터는 일본 여러 유지 신사와 교제하여서 일선(日鮮) 민족의 행복되는 일이든지 일선 양 민족의 동화에 대한 계획에는 어디까지 참여하여 힘이 미치는 대로 몸을 아끼지 않고 힘써 볼 생각이다"({매일신보}, 1915. 3. 14). 이 말은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되었다가 친일 전향을 조건으로 1915년 2월 13일 특사로 출감한 윤치호가 매일신보사 기자와 가진 인터뷰의 한 대목이다. 윤치호는 1881년 17세 때 신사유람단 조사(朝士)였던 어윤중(魚允中)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한국 최초의 동경 유학생의 한 사람이 되어 개화사상을 수용하였다. 또 갑신정변 때는 개화당의 일원으로 조국의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위해 활동하였다. 그후 윤치호는 10여 년 간 중국과 미국으로 망명·유학하여 서구 민권사상과 기독교 신앙을 수용했으며, 독립협회운동이 절정기에 달한 1898년경에는 독립협회 회장, 독립신문 주필 그리고 만민공동회의 최고 지도자로서 민권운동과 참정·개혁운동을 정력적으로 지도하였다. 한말에는 계몽운동에 의한 실력양성운동에 진력하여 신민회에도 관여하는 등 근대민족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그러나 윤치호는 개화기 시절부터 민족패배주의적 사고방식에 함몰되어 타협적 개량주의를 지향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1915년 이후 일제의 통치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게 하였고, 독립불능론 내지 독립무용론으로 변모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따라 그는 끝내 일제의 침략을 대세순응적으로 인정하여 일선융화에 동조하였으며,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과 전시동원체제 확립에 적극 협력하는 등 '선량한' 신민 윤치호에서 '충량한' 일본 귀족 이토 치카우(伊東致昊)로 입적한 채 일생을 마쳤다.

일본 남작으로 사망한 선친 윤웅렬

그의 부친 해평 윤씨 웅렬(雄烈:1840∼1911)은 1856년 16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한 후 대원군에 의해 발탁되어 출세한 무인 출신이다. 일찍부터 문명개화에 뜻을 둔 그가 본격적인 친일 문명개화노선을 걷게 된 계기는 1880년 7월 당시 별군관의 신분으로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의 수행원으로 도일하면서부터였다. 그는 함께 도일한 이조연(李祖淵)·강위(姜瑋) 등과 동양삼국의 합력을 취지로 하는 흥아회에 참석하였으며, 당시 도쿄에 머물고 있던 개화승 이동인(李東仁)의 소개로 일본 재야인사 등과 접촉하기도 하였다. 윤웅렬은 귀국한 이듬해인 1881년, 별기군 창설의 주역을 담당하여 별기군 좌부영관(左副領官)에 임명되었으며, 그의 아들 윤치호를 신사유람단 조사였던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파견하여 한국 최초의 동경 유학생이 되도록 하였다. 이처럼 근대화를 위해 노력하던 윤웅렬은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난을 피해 원산으로 도망한 후, 원산별원(元山別院) 주지 이시카와(石川子因)의 도움으로 일본 나가사키로 망명하였다. 2년 후 갑신정변을 계기로 귀국한 그는 개화당 내각의 형조판서가 되었으나 정변이 실패함에 따라 능주로 귀양을 갔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 후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자 풀려나서 경무사를 거쳐 군부대신의 자리에 올랐다. 그 후 윤웅렬은 민비시해사건 후 시신(侍臣) 일부와 구미파 요인들이 주동한 정부 개조 쿠데타 계획인 이른바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에 가담했으나, 내통하고 있던 안경수(安경馬+同壽)·이진호 등의 밀고로 계획이 탄로되어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이후 정치적으로 이용익(李容翊)과 대립했던 윤웅렬은 러일전쟁 무렵에 정계를 은퇴한 후 기독교에 귀의하였고, 1910년 일제의 조선강점 당시 조국과 민족을 팔아 버린 매국노들에게 수여하는 남작의 직위와 매국 공채 2만 5000원을 받았다. 그 후 윤웅렬은 1911년 9월 22일, 일본 귀족의 직함으로 식민지 조선 땅에서 사망하였다.

유업(遺業)을 이은 친일의 서막

일제의 조선강점 후 부친의 남작 직위를 승계한 윤치호는 1913년 10월 이른바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작위를 박탈당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1915년 감옥 문을 나설 때 디딘 땅, 우러른 하늘이 일제의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윤치호! 3·1 운동 거사 직전 국민대표로 나서도록 권유받았을 때 거절한 윤치호! 그는 3·1 운동 직후인 3월 7일, 기자회견을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강자와 서로 화합하고 서로 아껴 가는 데에는 약자가 항상 순종해야만 강자에게 애호심을 불러일으키게 해서 평화의 기틀이 마련되는 것입니다마는, 만약 약자가 강자에 대해서 무턱대고 대든다면 강자의 노여움을 사서 결국 약자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됩니다. 그런 뜻에서도 조선은 내지에 대해서 그저 덮어 놓고 불온한 언동을 부리는 것은 이로운 일이 못됩니다"(경성일보 1919년 3월 7일). 전날 이완용의 담화에 이어 발표된 이 담화문은 민족자결에 대한 부인(否認), 자치능력의 결여와 함께 독립불능론, 투쟁무용론을 주창한 것이었다. 이러한 윤치호의 독립불능론, 투쟁무용론의 내용은 일제 당국의 논리를 극명하게 대변함과 동시에 후일 일제가 벌인 정치선전의 주요 근간을 이루었다. 이러한 그의 매국 인식은 그 자신의 일기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나는 국경일에 일장기를 게양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본의 통치하에 있는 한 우리는 그 통치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다"(윤치호 일기  1919. 10. 1). 따라서 1920년대 윤치호의 활동은 주로 민족개량·실력양성·자치를 내용으로 하는, 예속적 타협운동인 문화운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즉, 윤치호는 1919년부터 1920년대 전반기에 걸쳐 전국의 각 지방 농촌을 무대로 '문화정치'라는 정치선전을 침투시키고 청년층의 반일 동향을 억제하는 데 이용된 교풍회(矯風會) 회장, 각도 조선인대표자회의, 1921년 6월 민족분열과 대일 타협화를 꾀하기 위해 결성된 조선인산업대회 연사, 범태평양협회 부회장 그리고 1925년 11월 결성된 태평양문제연구회의 회장 등 일제의 통치정책에 협력한 친일단체에 깊이 관여하면서 민족세력을 와해시키는 일제 통치 정책에 적극 앞장 섰다.

하나님의 종에서 일본 국왕의 종으로

1931년 만주침략 직후 총독부 주요 관료들과 친일 조선인들의 친목단체로 조직된 토요회, 1934년 3월 결성된 조선 대아세아협회 그리고 1935년 10월 일왕의 국민정신 작흥조서(作興調書)에 바탕한 내선일체를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교화단체연합회 이것이 1930년대 전반 윤치호가 그의 '새로운 조국' 일본을 위해 활동하던 단체들이다. 그러나 1937년 7월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전시체제가 더욱 강화되자 윤치호의 친일협력 강도도 더욱 높아만 갔다. 윤치호는 1937년 7월 총독부 학무국 주최의 시국강연회에 이어 2차 전선순회 시국강연반 강사로 활동하였으며, 이듬해 일제가 조선인의 병력자원화를 위한 제1차적인 조치로 '육군특별지원병제' 실시를 결정했을 때, 이것을 내선일체의 합당한 조치로 환영하였다. 또한 그 해 7월 황국신민화 실천운동의 조직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창립총회 준비위원 및 상임이사로 선정된 윤치호는 창립식에서 "천황폐하 만세"를 세 번 외쳐 조선의 '내지인'(內地人)임을 천명하였다. 이러한 윤치호의 황국신민화 운동은 종교 쪽에서도 이루어졌다. 1938년 5월 전도보국·황도실천을 목적으로 결성된 경성기독교연합회의 평의원으로 선출된 윤치호는 그 해 6월, 이른바 기독교의 일본화를 달성하기 위해 소집된 전조선기독교청년연맹위원회에 참가한 후 "이제야 대임(大任)을 마쳤습니다. 우리 기독청년들도 이제는 완전히 내선일체가 되었습니다"라는 요지의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같은 해 7월, 윤치호는 조선기독교연합회의 결성으로 기독교의 내선일체와 황민화 체제가 완성됨과 동시에 평의원회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1939년 10월 동경 아오야마 학원(靑山學院)에서 감리교의 내선일체를 위해 조선의 감리교회와 일본의 메소디스트 교회의 합동을 논의하는 일선(日鮮) 감리교회 특별위원회가 개최되자, 정춘수, 김영섭(金永燮), 신흥우(申興雨), 양주삼, 유형기(柳瀅基) 등과 함께 전권위원으로 참가하였다. 이 회의에 평신도 대표로 참석한 윤치호는 조선 감리교단의 자주권을 이양하고 일본 감리교단으로 종속시키는, 사실상의 기독교 황민화에 동의하고 말았다. 이로써 윤치호는 기독교 신앙의 근간인 십계명 제1조 "나 이외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규율을 어기며 하나님의 종에서 일본 국왕 종으로 '개종'을 하는 이단을 범하고 말았다.

"내 아들이어든 속히 지원하라"

"이러한 초비상시에 우리의 애국적 열정을 보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겠는가?"(윤치호 일기 1941. 8. 5) "조선인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하기를 기대하는가?"(윤치호 일기 1941. 12. 29)

이것은 태평양전쟁 무렵인 1941년 8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사무국 총장을 찾아가서 질문한 내용과 전쟁이 일어난 후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과의 인터뷰에서 윤치호가 질문했다는 그의 일기 내용이다. 여기에는 '새로운 조국 일본'에 대한 윤치호의 '애국사상'이 잘 드러나 있다. 그의 '애국사상'을 감안한다면 윤치호가 결전보국강연회에서 조선인의 협력을 강요하고, 신궁참배단(神宮參拜團)을 파견하는 등 황민화운동에 적극 앞장 섰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이러한 '충성심'에서 이토 치카우로 개명한 그는 1941년 8월 발기된 임전대책협의회 위원으로 참석하여 "우리는 황국신민으로서 일사보국(一死保國)의 성(誠)을 맹세하여 임전국책에 전력을 다하여 협력할 것을 결의함"이라는 결의문을 의연히 낭독하였다. 또한 그는 임전대책협력회가 일제의 전쟁자금 조달을 목적으로 매출한 채권을 판매하기 위해 종로·동대문 등지에서 채권 가두 유격대로 '후방에서 투쟁'하였다. 그러나 임전대책협의회는 최린·김동환 계열의 조직이었기에 윤치호는 1941년 8월 고원훈·박흥식·이승우·양주삼(梁柱三) 등 자파 계열을 따로 모아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위원장이 된 후, 황국정신 앙양, 근로보국 강행을 실천할 것을 채택하였다. 이에 총력연맹 사무국 총장 가와기시 분사부로(川岸文三郞)는 친일단체의 분립을 막기 위해 통합을 주선하였다. 그리하여 1941년 10월 22일, 윤치호는 친일세력을 총망라하는 조선임전보국단 조직의 고문으로 선출되어 친일의 헤게모니를 성취하였다. 1941년 12월 진주만 습격 이틀 후 윤치호는 총력연맹 주최 결전보국 대강연회에서 '결전체제와 국민의 시련'이라는 제목으로 "이 결전은 제국의 1억 국민뿐만 아니라 동양 전 민족의 운명이 여기에 달려 있다. 이 성스러운 목적 관철에 우리 반도 민중도 한몫을 맡아 협력치 않으면 안 될 것"이라며 조선의 아들들을 '일제의 총알받이'로 내모는 사냥꾼으로 광분하기 시작하였다. 1943년 징병제 실시에 즈음하여 윤치호는 "우리는 조선 청년을 영광스런 일본 해군의 자랑스런 대열으로 받아들인 데 대하여 제국정부에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이어 학병제도가 실시되자 "파격의 영광인데 어찌 주저할소냐. 개인과 가정, 일본과 세계 인류를 위해 총출진하라"는 요지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일본 귀족의 반열에 오르기 부족했다고 생각했던가 ? 그해 11월 윤치호는 이광수·박흥식·송진우·주요한·한상룡 등과 함께 학도병 종로익찬위원회를 개최하여 학병 권유를 위한 호별 방문, 권유문 발송, 간담회, 학교강연회 개최 등을 결의하고, 5일 동안 진명학교 등 10개 소에서 학병권유 부형간담회를 열었다. 이어 11월 6일에는 "내 아들이어든 속히 지원하라는 전보를 발송하자"고 부형들에게 보내는 격려담화를 발표하였다. 또한 당일 중추원에서 타합회를 가진 뒤 학병제의 솔선협력을 결의한 후, 평남지역 독려강연반 연사가 되어 이튿날 90여 명과 함께 YMCA에서 학병제 경성익찬위원회를 조직하여 학병독려를 본격화하였다. 윤치호는 또 12일 평양에서 강연하는 한편 {매일신보}에 주요한의 [나서라! 지상명령이다]라는 글과 함께 독려의 담화문을 발표하여 거의 1면을 장식하였다. 조선 젊은이의 피의 대가로 윤치호는 1945년 4월 일제에 의해 칙선귀족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부친의 뒤를 이어 2대째 '일본의 귀족'으로 입적하게 되었다. '조선내 7인의 일본 귀족'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된 윤치호는 박중양(朴重陽) 등과 함께 일본의 '망극한 처우개선'에 감사하고자 조직된 처우감사 사절단 대표사절로 선임되었다. 이에 윤치호는 먼저 조선신궁에 봉고제를 올린 후 총독과 군사령관을 방문하여 감사를 표하였다. 이어 서울을 출발, 일본으로 간 윤치호는 일본 관계 요로에 감사를 표한 후 귀국하였다. 1945년 2월 박춘금이 결성한 대화동맹(大和同盟) 위원장으로 취임한 윤치호는 '황은에 보답하기 위해' 일제의 필승체제 확립과 내선일체를 촉진하는 활동을 하였다. 또한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성전'(聖戰) 완수에 매진하고자 그해 6월 결성된 언론보국회 고문으로 취임하여 조선이 해방되는 날까지 일제 귀족으로서 그의 직분을 충실히 행하였다. 그러나 윤치호는 해방되던 해 12월 뇌일혈로 개성부 자택에서 사망함으로써 조선 땅에서 '귀화한 일본인'으로 80여 년의 생을 마감하는 '비운'을 당하였다.

남작과 귀족원 찬의의 후예들

윤웅렬은 슬하에 치호·치왕·치창을 두었다. 윤치호의 동생 치왕(致旺)은 영국 유학생 출신 의학박사로 해방후 군의감을 지냈으며, 막내아우 치창(致昌)은 1949년 초대 주영공사를 지낸 인물이었다. 또 그의 장남 일선(日善)은 미영타도 대강연회 연사로 참가한 적이 있으며, 차남 명선(明善)은 만주국 총무청 사계처(司計處) 통계과장을 지냈고, 막내 승선(昇善)은 일본군 관동사령부 대위였다. 또한 자유당 시절인 1950년 1월부터 11월까지 농림부장관을 지낸 윤영선(尹永善)도 윤치호의 장남이다. 윤웅렬의 동생 윤영렬(尹英烈)은 치오, 치소, 치성, 치병, 치명, 치영을 자식으로 두었다. 장남 윤치오(尹致旿)는 갑신정변 당시 친일개화파로 지목되어 도일한 후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학업을 마치고 한때 동경외국어학교에서 조선어 교사생활을 하였다. 13년 만에 귀국한 그는 대한제국 말기 학무국장과 일본 유학생 감독을 지냈고, 일제의 한국강점 후 1915년 3월까지 약 4년 6개월간 중추원 찬의(贊議)를 지냈다. 차남 치소(致昭)는 일제 식민지하에서 실업가로 활동하였는데, 1911년 5월 당시 조선상업은행 감사였던 그는 동양서원(東洋書院)과 혁신점(革新店)을 경영하면서 분원자기주식회사 감사를 지냈다. 1924년 4월부터 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3년간 역임하였으며, 1937년 8월 당시 쌀 120가마에 해당하는 2천원을 국방헌금으로 기증하고 9월에는 애국경기도호 군용기헌납기성회 집행위원을 맡았다. 그의 아들 윤보선(尹潽善)은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을 지냈다. 삼남 윤치성(尹致晟)은 1899년 어담(魚潭)과 함께 일본육사를 졸업하고 구한국 기병 중장을 역임하였으며, 1910년 이후에는 실업계로 진출하여 분원자기 취체역과 경성조선인상업회의소 특별위원 등을 지내다 요절하였다. 막내 윤치영(尹致映)은 미국 아메리칸 대학원을 졸업하였고 한때 임시정부 구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이승만의 측근을 지켰던 사람이었다. 1936년 중앙기청 부총무가 되었으며 1941년 태평양전쟁 무렵부터는 전향노선에 서서 임전대책협의회 채권가두유격대에 참가하였다. 또한 같은 해 12월 동양지광사 주최의 미영타도(美英打倒) 대좌담회 연사로 참가하여 황민(皇民)의 사명에 대해 연설하였으며, {매일신보} 사설에 대동아공영권 건설에 미칠 회담의 영향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해방후 그는 이승만의 신임을 얻어내무부장관과 국회 부의장 등을 굵직한 요직을 역임하였다.

                                                           ■ 김도훈(국민대 국사학과 박사과정)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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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상찬, [내가 본 윤치호선생], {혜성} 1권 2호, 1931(太學社, {한국근세사논저집} 2,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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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기, {국역 윤치호 일기}(상·하), 탐구당, 1975.